개그

개그만 하기도 힘든데 영어까지 하면 힘들지 않겠습니까?

하나라도 잘하는게 전문가.

by 외영다로 | 2009/11/19 23:55

“익명으로 살기 지루했다” 고백



블로그에 매춘 이야기 띄워 드라마로도 제작 화제

논문 준비하며 돈 아쉬워 나서
“익명으로 살기 지루했다” 고백

2003년 10월부터 영국에서는 ‘벨 드 주르(Belle de Jour·낮의 여인): 런던 창녀의 일기’라는 온라인 블로그가 큰 화제였다. 자신을 런던의 고급 창녀라고 밝힌 ‘벨 드 주르’라는 인물이 14개월 동안 만난 남성과의 성관계 등을 솔직하고 재미있으면서도 뛰어난 문장력으로 묘사한 것. 유명세를 타고 2005년에는 블로그 내용을 묶어 책이 나왔고, 2007년에는 TV드라마 ‘런던 창녀의 비밀일기’로까지 제작됐다. 이후 벨 드 주르가 누구인지에 대한 온갖 추측이 난무했지만 그 정체는 6년간 영국 문화계의 비밀로 남아 있었다.

그런 벨 드 주르가 15일 유력 일간지 더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실체를 드러냈다. 주인공은 자그맣지만 아름다운 몸매를 지닌 금발의 34세 여성 브룩 매그넌티 씨(사진)였다. 그는 셰필드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고 브리스틀에 있는 성()마이클스병원의 아동건강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가 ‘창녀 커밍아웃’을 한 까닭은 일부 언론에서 자신의 실체에 접근하고 있었던 데다 “익명으로 살기가 지루했기 때문”이다. 입이 가벼운 전 남자친구가 언제 비밀을 폭로할지 모른다는 점도 고려됐다고 한다.

매그넌티 씨는 창녀 일을 한 것에 대해 “박사학위 논문을 준비하던 시절이었는데 집세도 못 낼 지경이었다”며 “바로 일을 시작하고, 현금을 빨리 손에 쥐면서 논문 쓸 시간도 낼 수 있는 일을 찾다보니 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는 인터넷으로 ‘바버렐라 에이전시’라는 매매춘 회사를 통해 1회 두 시간의 ‘만남’에 300파운드(약 58만 원)를 받는 창녀로 변신했다. 이 중 수수료를 뗀 200파운드(약 38만 원)가 그의 몫. 일주일에 ‘손님’은 두서너 명. 14개월 동안 상대한 남성은 수백 명이었다고 한다.

지금까지 그가 벨 드 주르라는 사실을 안 사람은 연구소 동료를 비롯해 6명뿐. 그의 출판계약을 대행했던 에이전트도, 부모도 몰랐다고 한다. 창녀 생활에 후회는 없지만 다시 하고 싶지는 않다고 밝힌 그는 동거 중인 남자친구와 아이를 낳고 싶다고 말했다. 장차 태어날 아이에게는 솔직하게 모든 사실을 이야기해 주겠다고 했다.

by 외영다로 | 2009/11/17 17:40 | [전체공개]

이창호

국민 상머슴 이창호

 

 


 잔뜩 피로에 젖은 모습이었다. 국토 남단 제주도 성산포 휘닉스 아일랜드 내 한식당. 점심을 시켜놓고 기다리는 그의 얼굴이 붉다. 이건 이창호가 몹시 피곤할 때 나타타는 증상이다. 그는 오늘(11일) 조선족 중국기사 퍄오원야오(박문요)를 상대로 준결승전을 두는 중이다. 제14회 LG배 세계기왕전도 거의 막바지까지 왔다.


 “바둑 두다 보면 자주 그래요.” 기자가 걱정하자 이창호가 웃으면서 말했다. ‘자주 그렇다’는 말은 ‘자주 붉어진다’는 뜻이다. 그는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이다. 프로기사들 상당수가 스트레스와 체력 소진으로 힘들어하는데, 이창호에겐 항상 이런 증세가 찾아온다. 올해 34세인 그는 3년 전엔 대국 직후 쓰러진 적도 있었다. 요즘은 거의 회복됐다더니, 오늘 보니까 그게 아니다.


 왜 피곤하지? 요즘 그의 스케줄을 보면 그런 말 할 수 없다. 지난 달(10월) 25일 이후 11월 11일까지 18일 간 9판을 소화했다. 이틀에 한 판 꼴이라면 그 자체로 살인적 일정이다. 게다가 그 기간 동안 비행기로 이동하는 스케줄이 두 차례나 끼었다. 중국서 열렸던 삼성화재배 3국이 끝난 것이 5일. 이튿날 귀국한 이창호는 당초 LG배 8-4강전을 위해 7일 제주도로 향할 예정이었으나 바둑리그 때문에 발이 묶였다.
 

 7일 저녁 바둑리그를 둔 그는 일행보다 하루 늦은 8일 현장에 왔고 이튿날 추쥔과의 8강전을 치렀다. 그리고 하루 쉰 뒤 준결승에 임했으니 얼굴에 열꽃이 필 만도 했다. 12일 상경한 이창호 앞에는 13일(국수전) 16일(명인전) 18일(명인전) 대국이 줄줄이 대기 중이다. 그나마 바둑리그에서 소속 팀이 탈락하지 않았더라면 도무지 대책이 없을 뻔 했다.


 중요한 것은 약 20일 남짓한 이 기간 동안 한국 바둑계엔 이창호 하나만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비록 준결서 패해 탈락하긴 했지만 그는 삼성화재배 4강에 든 유일한 한국기사였다. LG배에선 추쥔과 퍄오원야오 등 질기디 질긴 두 강자를 연파해 기어이 결승 티켓을 따냈다. 특히 추쥔은 불과 나흘 전 삼성화재배 준결승서 자신을 탈락시킨 장본인이었다. 얼마나 통쾌했던지....
 

 만약 이창호가 이번 LG배 2판 중 한 판이라도 졌다면? 상상만 해도 끔

찍한 일이 벌어질 뻔 했다. 이달 초 준결승을 치른 결과 삼성화재배는 중국기사끼리 결승전이 결정된 상태다. 거기에 LG배까지도 같은 결과가 되는 것이다. 지난 10수년 간 한국바둑은 이 2개의 한국주최 기전을 텃밭삼아 세계를 지배해 왔다. 올 연말과 내년 초 우리 땅 안방을 온통 중국 잔치마당으로 내줘야 한다니, 바둑계에 이보다 더 한 재앙이 또 있을까.


 돌이켜 보면 우리는 이창호를 참 오래도 ‘부려먹었’다. 그는 17세 때인 92년 첫 세계제패(동양증권배) 이후 무려 21회(비공식전 2회 제외)나 조국에 우승을 바쳤다. 지구상 다른 누구도 따라갈 수 없는 엄청난 우승 점유율이다.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이창호 한 사람만 쳐다보며 ‘끼니’를 해결해 달라고 떼를 쓰고 있다. 가위 ‘국민 상머슴‘이다.
 

 물론 신예들이 한 몫씩 거들고는 있다. 올해 최철한이 잉씨배를, 강동윤이 후지쓰배를 따 왔다. 그런데 더 이상의 진전이 없다. 두 ’세계 챔프‘는 간혹 뒷걸음질 치는 느낌까지 준다. 그만큼 안정감이 부족하다. 게다가 이창호의 후계자로 확실하게 자리매김한 듯 했던 이세돌은 곡절 끝에 현재 장막 뒤로 사라져 있다. 이창호에 부과된 하중이 너무 커 보인다.

 

 이창호는 준결승 승리 후 가진 인터뷰 자리에서 “국내 정상급 후배 몇 명은 세계대회서 우승해도 이상할 게 없는 실력”이라며 “아마도 머지 않아 자기 실력을 펼칠 것”이라고 했다. 후배들을 향한 덕담이다. 어느 정도 진심이기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기자 귀에는 마치 자기에게만 쏠리는 부담을 나눠 갖자는 비명처럼 들렸다.


 86년 프로가 된 후 24년 째 기사생활 중이니 지칠 때도 됐다. 전성기 시절의 이창호는 국제무대서도 결승전 진출이 곧 우승을 뜻했다. 그 공식은 그러나 5년 전부터 무너졌다. 2005년 제5회 춘란배 제패 이후 5년 간 이창호는 9차례 결승에 나가 8번을 준우승했다(그나마 한 번은 마이너 국제대회인 중환배였다). ’상머슴’에 대한 ‘상전’들의 일방적 기대가 그를 마지막 순간 얼어붙게 한 것은 혹시 아니었을까.


 내년 2월 하순 이창호는 LG컵을 걸고 중국의 쿵제와 결승 3번기를 펼친다. 쿵제는 이번 제주시리즈에서 최철한과 박영훈을 거푸 따돌렸다. 이창호 대 쿵제 간 통산전적은 5승 3패로 이창호의 우세. 그러나 문제는 상대가 누구냐에 달려있는 게 아니다. 열쇠는 이창호 자신이 갖고 있다. 정신적 부담감과 육체적 피로가 악순환하는 한 또 한 번의 준우승을 추가할는지도 모른다.


 한국 바둑은 과거 10년 넘게 세계를 휩쓸었지만 이렇게 ‘상머슴’ 한 사람만 부려먹은 적은 없었다. 스승 조훈현이 이창호를 이끌기도 하고 뒤를 밀어주기도 했다. 절친한 선배 유창혁도 간간이 이창호에게 쉴 공간을 만들어주었었다. 2000년대 진입 후엔 이세돌이 짐을 나눠서 졌다.

 

 최철한 박영훈 강동윤...의 나이 때 이창호는 세계타이틀 몇 개씩을 번쩍번쩍 들어올렸다. 힘 좋은 진짜 ‘상머슴’이었다. 그 상머슴이 실력을 인정하는 스물 초반의 그들이 좀 더 정진해야 한다. 이세돌 또한 하루라도 빨리 이 전쟁터에 합류해야 옳다. 이번 LG배 ‘중국 대표‘로 남은 쿵제는 27세다. 이세돌보다 한 살, 박영훈 최철한보다는 세 살 위다..

 

 해물뚝배기 국물만 몇 술 뜨고 밥을 반 이상 남긴 채 일어났을 때 이창호의 얼굴 빛은 여전히 붉었다. 기진한 표정으로 다시 대국장에 들어가는 그의 뒷 모습이 얼마나 안쓰럽던지... 이창호는 그런 상태로 마지막 땀 한 방울까지 짜낸 끝에 기어이 승리했다. 온 몸으로 전멸을 막아낸 것이다.

 

 24년이나 부려먹은 ‘국민 상머슴’을 홀로 앞세워 석 달 뒤 결승에 또 한 번 등을 떠 밀어야 할 상황까지 왔다. 곰곰 생각해 보면 참 진땀나는 일이다.



by 외영다로 | 2009/11/13 14:28 | [전체공개]

김현식

삶의 마지막 불꽃을 무대 위에서 태우고 떠나버린 가수 김현식. 바람이 차가워지는 매년 이때, 우리는 그가 그립다. 삶의 비애, 사랑의 고통을 노래한 그의 거친 음색이 이제는 살아있는 우리에게 서투른 위로가 된다. 죽어서 불멸이 된 그의 인생을 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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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예인들에게는 몸조심해야 하는 달로 유명한 11월이 돌아왔다. ‘11월 괴담’은 많은 연예인의 사고와 법정공방, 이혼, 음주운전 입건, 비디오 사건 등 각종 이슈가 유독 11월에 집중적으로 일어난 것을 두고 생겨난 징크스다.

그렇다면 11월 괴담설의 진원지는 누구일까? 요절가수인 김현식과 유재하가 주인공이다. 두 사람의 사망일자는 똑같이 11월을 여는 첫날, 1일이다. 이들은 생전에 절친한 음악 선후배였고, 밤을 새워가며 음악과 인생을 논했던 술친구이기도 했다.

사연은 이렇다. 유재하는 1987년 데뷔 음반을 발표하고 3개월 후 노래가 알려지려는 시기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3년 후 김현식이 세상을 떠나자 “유재하가 저승에서 너무 쓸쓸해 술친구였던 김현식을 데려갔다”는 괴소문이 번진 것이다.

이후에도 11월이면 연예계에는 사건사고가 그치지 않아 ‘마의 11월 괴담’은 일파만파로 번져나갔다. 포효하는 목소리로 세상 모든 사랑의 고통을 껴안듯 슬픔과 고독을 노래하다 요절한 김현식.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벌써 열아홉 번이나 초겨울 전령이 방문했다.

어느 후배의 상갓집에서 노래 주제를 놓고 민족을 이야기한 김민기와, 사랑을 최우선에 두었던 김현식. 두 사람의 일촉즉발의 한판 대결은 널리 회자하는 이야기다. 김현식의 치열한 사랑노래들은 온 세상 연인들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불멸의 연가들이다. 포크·록·발라드·블루스 등 다양한 장르를 넘나든 그의 음악은 풍성했던 1980년대 한국 대중음악의 기름진 자양분이었다.

사랑의 고통을 홀로 짊어진 듯 울부짖는 그의 힘에 넘치는 보컬을 지배한 정서는 바로 슬픈 사랑의 감정이었다. 조용필의 1인 독주시대로 대변되는 1980년대 대중음악은 그 어느 때보다 다양한 뮤지션과 풍성한 장르의 음악이 넘쳐나던 최고의 활황기였다.

주류 인기가수도 음악성이 담보된 명반을 발표했던 시기가 이때였고, 오락적 요소가 부족한 언더 뮤지션들도 주류 가요 차트에 명함을 들이대는 이변이 가능했던 시절도 이때였다. 주류 대표선수가 조용필이었다면 언더의 대표주자로 김현식과 록밴드 들국화를 꼽을 수 있다.

김현식은 사후에 더 화제의 중심에 선 뮤지션이다. 그의 짧은 인생은 사랑과 더불어 삶과 죽음의 문제들에 대한 번민과 고통으로 뒤범벅돼 있다. 그의 노래 전반에 걸쳐 광범위하게 녹아있는 슬픈 정서는 그 때문이다. 데뷔 앨범에 수록된 <당신의 모습>은 고등학교 자퇴 후 다운타운 무명가수 시절 경험했던 실연의 아픔을 그린 노래다.

데뷔 시절 미성이었던 그의 음색은 힘겨운 삶과 함께 탁하게 변모했다. 우리가 기억하는 거칠고 호소력 있는 김현식 특유의 허스키 보컬은 그의 혼란스러운 삶의 궤적과 더불어 더욱 색채가 짙어갔다.

고등학교 중퇴 이후 업소 무대에서 가수생활 시작

어린 시절부터 승부욕이 남달랐던 그는 동네에서 싸움닭으로 통했다고 한다. 1965년 혜화초등학교 입학식 날에도 어김없이 학교 뒷마당에서 고학년 선배들과 피투성이로 나뒹굴며 한판 싸움을 벌였을 정도. 김현식의 음악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어린 시절의 치명적 사건을 언급해야 한다.

1966년 경기여고를 나와 춘천 성심여대에 다니던 사촌누나가 학교 보일러실 굴뚝으로 투신자살한 끔찍한 사건이 있었다. 미모의 여대생 자살사건은 세간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남자관계에 의한 자살이라는 소문이 난무하며 염세적인 문학소녀의 자살로 일간지 사회면을 큼지막하게 장식했던 이 사건은 어린 김현식의 가슴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끔찍하게 좋아했던 사촌누나의 돌연한 자살은 열 살도 되지 않은 그가 감당하기에는 벅찼다. 이때의 충격은 이후 평생 사랑과 삶, 죽음의 문제들에 대한 번민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쳤던 원초적 콤플렉스로 그의 노래 전반에 녹아들었다.

아버지의 사업 때문에 충북 옥천에서 살았던 시절 듣던 대나무밭 바람소리, 맑은 금강에서 서울 촌놈이라고 놀리던 옥천 아이들과 마주한 일, 집안에서 운영하던 갈포공장의 높은 굴뚝 등은 아름답고 소중한 이미지로 가슴 속에 담겼다. 1971년 전교 4등의 뛰어난 성적으로 보성중학교에 진학하면서 정릉에 있던 큰집에 기거했을 때 홍익대에 다니던 사촌형 양국정이 그의 첫 기타 선생님이 됐다.

김현식은 곧 박인수의 <봄비>, 비틀스의 <오 달링>, CCR의 <프라우드 메리> 등을 그럴 듯하게 연주하기 시작했다. 음악에 빠져들자 공부를 잘했던 그는 사고뭉치로 변해갔다. 더구나 아버지가 운영하던 간장공장이 망해 집안이 어려워지면서 다른 학교 학생들과 패싸움을 벌이는 반항아로 전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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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하게 지망한 경기고에 낙방하고 후기 명지고에 진학해 밴드부에 들어갔다. 어느 날 선배의 악기를 만진 죄로 혼내는 선배들과 한판 싸움을 벌였다. 밴드부에서 쫓겨난 그는 1학년을 채 마치지도 못하고 자퇴했다. 이후 종로통의 꼬마 깡패들과 어울리며 야간업소들을 제 집 드나들 듯 출입했다.

기타를 치며 유행곡을 멋들어지게 부르는 장발의 아마추어 가수들이 그의 눈에 박혔다. 가수가 되겠다고 결심한 그는 집에 틀어박혀 노래 연습에 몰두했고, 곧 ‘벌판’이라는 작은 업소에 나가기 시작할 만큼 실력이 늘었다. 생전에 그는 “출연료도 없이 지배인 기분에 따라 차비 몇 푼씩 받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매일 무대에 올라 노래 부르는 것만으로 행복했던 시절”이라고 술회했다.

그는 어린 나이에 두 살 연상인 연세대 철학과 여대생과 첫사랑에 빠져 실연의 아픔도 일찍 겪었다. 그때 이별의 공백을 그린 노래가 데뷔 앨범에 수록된 <당신의 모습>이다. 밤무대를 전전하던 1976년 어느 날, 콧수염가수 이장희의 친동생 이승희가 듀엣을 제의해 이름도 없이 듀엣을 결성했다.

그때 김현식의 노래 실력을 눈여겨보던 이장희가 정식으로 그의 노래를 테스트했다.이장희는 뛰어난 감수성과 호소력 짙은 보컬에 성공 가능성을 느껴 곧 음반 제작에 들어갔다. 기쁨에 들뜬 김현식도 혼신의 힘을 다해 밤잠을 설쳐가며 녹음작업에 임했다. 하지만 녹음을 끝내고 음반이 나오기를 기다리던 중 이장희가 사업 부도로 미국으로 도피하는 사태가 벌어지면서 정식 가수 데뷔의 달콤한 꿈은 산산조각이 났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김현식은 대마초사건에 연루돼 8개월간 구속됐다. 결국 그의 노래는 4년이 지나서야 세상의 빛을 보았다. 음악적 노선이 정립되지 않았던 이 시절, 맑은 미성으로 포크·소울·록·트로트 등 다양한 장르의 노래를 선보였다. 대중의 반응은 미미했지만 자신의 음반이 나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다.

하지만 어린 나이에 밤무대의 현란한 조명에 빠져들고 술과 대마초에 취해버린 그는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매일 새벽 고독감에 몸을 떨었다. 이화여대 앞 옷가게의 주인아가씨였던 김경자는 당시 그에게 큰 위안과 삶의 행복을 안겨준 아내다. 외아들 완제를 얻고 아내와 함께 피자가게를 운영했던 당시는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었다.

폭음과 줄담배로 인한 건강악화로 자택에서 숨져

어느 날 TV에서 민해경과 같이 팝송을 부르는 김현식의 가창력을 눈여겨본 동아기획이 그를 스카우트해 2집 작업에 들어갔다. 당시 그의 녹음 장면을 지켜보았던 조원익의 말이다. “대단했어요. 무언가 다른 음악이었죠. 아무런 절제도 없는 그야말로 생음악 같은 노래였는데, 거칠고 호소력 있는 목소리였습니다.”

1984년 2집 <사랑했어요>가 발표되자 방송보다 음악다방·나이트클럽 등 다운타운가에서 “도대체 어떤 가수냐”며 술렁거렸다. 하지만 그의 앨범 이후 발표된 들국화는 더욱 큰 폭풍을 몰고 왔다. 동아기획의 모든 홍보기획은 들국화 위주로 편성돼 김현식과 전인권 사이에는 묘한 애증의 라이벌 관계가 형성됐다.

2집 발표 후까지 녹음실 세션들과의 일상적 음악작업에 불만을 느껴온 그는 1985년 음악후배 김종진·전태관·박성식·장기호와 5인조 밴드 ‘봄여름가을겨울’을 결성했다. 김현식 최고의 명반으로 손꼽히는 3집은 이들의 합작품이다. 그는 이 앨범을 통해 노래만 잘하는 가수가 아닌, 뛰어난 감성의 송라이터임을 확인시켰다.

3집은 30만 장 판매라는 ‘대박’을 기록하며 그에게 대중적 인지도를 안겨주었다. 음악적으로는 블루스로 진화하는 가교 역할도 했다. 대중적 인기를 획득한 후에도 김현식은 TV 등 주류 매체에서는 만나기 어려운 언더 뮤지션의 활동 방식을 고수했다. 음악보다 계산된 환경의 방송 분위기에 거부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3집 이후 ‘얼굴 없는 최고의 가창력 가수’로 대중에게 회자하기 시작했다. 음악적 명성은 높아갔지만 아내와 별거에 들어가면서 사랑하는 아들과도 헤어져 살게 됐다. 또한 자신을 사랑해주던 누나가 결혼과 함께 캐나다로 이민을 떠나버려 그는 극심한 고독감에 빠져들며 방황했다.

3집까지 특별한 음악적 성향 없이 혼재된 어법으로 자신의 메시지를 담았던 그는 ‘신촌블루스’의 이정선과 엄인호를 만나면서 삶의 목소리를 담아내는 블루스로 음악 색깔을 채색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그는 노래 중간에 제 흥에 겨워 외치는 애드리브가 눈에 띄게 늘어가고 보컬도 탁해졌다.

당시 선보였던 <골목길> <이별의 종착역> 등은 음악적으로 물이 오른 그의 노래의 정수를 맛보게 해주는 트랙들이다. 1987년 들국화 멤버들과 함께 그는 다시 대마초 상용혐의로 구속됐지만 5개월 후 삭발하며 절치부심했다. 그 결과 1988년 말 <일간스포츠> 골든디스크상을 수상하며 최고의 가수로 떠올랐다.

그러나 밤샘녹음·폭음·줄담배는 치명적 건강악화를 불러왔다. 병원에 실려 가는 횟수가 늘어가면서 최후가 다가왔다. 1990년 5집 <넋두리>는 허무감이 짙게 깔린 거칠고 처절한 당시의 음성을 담은 음반이다. 이후 영화음악 앨범 <비오는 날의 수채화>에 참여하며 전국 순회 라이브콘서트를 열었다.

그는 복수가 차올라 올챙이배처럼 튀어나온 배를 움켜쥐고 꺼져가는 생의 마지막 불꽃을 무대에서 불태웠다. 항상 술에 취한 상태였던 김현식은 그의 유작 앨범이 된 6집 녹음을 마칠 무렵이던 1990년 11월1일 오후 5시20분 자택에서 간경화로 세상을 등졌다. 이 앨범은 생전보다 더 큰 대중의 관심과 애정을 몰고 오는 신드롬을 불러 일으켰다.

불황 여파에 날씨까지 곤두박질해 마음이 스산하다. 그래서일까? 11월에 사망한 김현식의 음악은 더 애절하게 다가온다. 슬픈 그의 음악은 희망적이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사랑의 아픔에 고통받는 영혼들에게 ‘위로’의 미덕을 발휘했다.

사실 대중음악의 가장 큰 기능은 방황하는 영혼들을 ‘위로’하는 것 아니겠는가? 김현식은 사랑을 노래로 자유롭게 이야기하다 떠난 우리 시대 최고의 가객이었다.

by 외영다로 | 2009/11/13 13:42 | [전체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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